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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유력한 총리 후보는 나와즈 샤리프,그의 동생 셰바즈 샤리프,임란 칸, 빌라왈 부토입니다. 임란 칸은 감옥에 수감되어 사실상 참여를 못하게 되었으나, 총선결과가 어떻게 그의 운명을 바꿀지는 아직 불투명합니다. 임란 칸이 등장하기 전에 나와즈 샤리프와 빌라왈 부토의 어머니인 베나지르 부토는 파키스탄 정치의 양대 산맥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파키스탄 정치와 역사에 영향력이 많은 이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 or 셰바즈 샤리프(SHABAZ SHARIF)
- 창립당 (PML-N)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 나와즈 가문은 원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펀잡 주로 이주해 왔습니다. 영국령 인도 당시에 현재 인도에 있는 펀자브 주 암리차르 지역( 현재 시크교도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의 자티 우므라 마을에 정착했는데 1938년 파키스탄 라호르로 다시 이주합니다. 아버지인 미안 무함마드 샤리프는 이테파크와 샤리프 그룹을 창시한 사업가였습니다. 나와즈 샤리프는 파키스탄 중상류층에서 태어나 경영학을 전공하고, 펀잡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합니다. 1981년에 정계에 들어서게 되고 총 3번의 총리에 당선(1993,1997,2013)이 되었으며, 현재 나와즈 샤리프뿐만 아니라 동생인 셰바즈 샤리프, 그리고 딸인 마리암 나와즈 등 정치와 사회사업,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
- 인프라 개발 : 나와즈 샤리프는 매트로 버스와 지하철, 고속도로 개발과 다리, 도로 확장을 촉진하여 교통편의성을 향상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개발 목표는 일대일로 사업이었으나 완성되기 전에 해임됩니다.
- 경제 개혁 : 그의 정부는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투자 환경을 개선하고 산업 부문에 투자하고 기업환경을 개선하였습니다. 나와즈 샤리프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민영화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 사회적 사업 : 교육이나 보건을 위해 기초 건강 시스템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장애아동 학교를 운영합니다.
- 에너지부족에 대한 대응 :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태양광, 수력, 풍력발전등을 통해 에너지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나 현재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 3번의 총리직을 수행했지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017년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에 연루되어 공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 : 2016년 4월 파나마 문서 공개(샤리프 전 총리의 가족이 해외에 비밀 계좌를 개설하고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조사를 실시하고 총리직에서 파면한 사건, 런던의 아파트와 제강소 설립)
2. 임란 칸(IMRAN KHAN)
- 파키스탄의 전 총리이자 정치인이면서 전 크리켓 선수였던 임란 칸은 현재 수감 중입니다.
- 1992년 크리켓 월드컵에서 파키스탄의 우승을 이끌었고, 은퇴 후 1996년에 파키스탄 정의운동(PTI)을 설립했습니다.
- 그는 부패청산, 교육개혁, 재생에너지 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2018년 총선에서 총리로 당선됩니다. 지식인과 젊은 층의 지지를 많이 받았고, 'NEW PAKISTAN'을 건설하자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 크리켓 선수로서, 그는 1992년 크리켓 월드컵에서 파키스탄의 우승을 이끌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크리켓 만능선수로 평가받았습니다. 실제로 인기가 너무 많아서 그 시대에 태어난 남아들의 이름을 임란이라고 짓는 경우가 많았답니다.(현지인에게 들은 일화)
- 암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했으며 나만 대학교를 건립했습니다.
- 재생에너지 생산을 증가시키고, 국립공원의 산림 개간과 확장을 시작하는 등 환경보호에 힘썼습니다.
- 인터넷 비자시스템을 도입하고 행정업무의 전산화를 진행했습니다.
- 불신임 결의안에 의한 파면 :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불신임 결의안에 의해서 파면되는데 야권은 그가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경제 회복에 실패하고, 부패 적격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외교 정책 또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도와의 긴장을 완화하려 했지만 카슈미르 문제와 관련하여 인도와 전쟁위기가 쳐해 지고,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의 협상을 지지하면서 미국의 불만을 사기도 합니다. 친중*친러 정책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이런 이유로 여권 소속의원들과 연정 파트너들이 야권에 가세하면서 그의 지지 기반은 무너졌습니다. 그는 불신임 투표를 막기 위해 의회를 해사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려 했으나, 대법원의 판결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불신임 투표를 미국과 관련된 음모라고 주장하고 전국 시위를 열어야 한다고 지지자들에게 호소했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불신임 투표에 패배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현재는 여러 가지 죄목으로 수감 중이고 총 34년 형을 구형받았습니다.
3.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BILAWAL BHUTTO ZARDARI)
- 나와즈 샤리프 가문이 사업가 집안이라면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 가문은 정확하게 따지면 가문이라기보다 외가가 건국 초기부터 정치를 한 정치가 집안입니다. 특히 외할아버지인 줄리프가르 알리 부토는 1957년에 파키스탄 사절단의 최연소 일원으로 유엔에 입성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합니다. 1958년에 파키스탄의 각료가 되고, 1963년에 외무장관이 되었습니다. 1971년 12월 15일에 제26차 유엔 총회에서 한 연설은 파키스탄에서 아직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는 이 연설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인정하고, 국제 사회에 파키스탄의 통일과 안전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연설은 부토의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언변으로 유엔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ㅕ연설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의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고 아마드 라자 카수리의 부친을 저격하도록 명령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1979년 2월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의 사형은 국제적인 비난과 탄원에도 불구하고, 지아울하크 장군의 명령으로 4월 4일에 집행되었습니다. 아직도 현지인들은 파키스탄의 진정한 정치지도자로 줄리프가르 알리 부토를 칭찬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 어머니인 베나지르 부토는 파키스탄의 전 총리이자 정치인으로 이슬람 국가에서는 최초로 여성 총리가 된 인물입니다. 그녀는 하버드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고 1988년과 1993년에 두 번 총리직을 맡았으나, 부패와 비리 혐의로 두번 모두 해임됩니다. 해임 후 영국에 거주하다가 2007년 귀국한 후 총선에 출마할 계획이었으나 유세를 마치고 돌아가려 차에 타는 순간 자살폭탄테러로 인해 암살됩니다. 그녀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의와 인권, 여성복지 등을 옹호하고, 테러리즘과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선언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당시 이런 정치 성향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의견과 남편에 의해서 암살당했다는 어이없는 주장까지 있으면서 한동안 혼란했습니다.
- 아버지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는 정치에 관여를 안 하다가 2007년 아내가 사망하고 나서 정치에 입문합니다. 2007년 12월에 아들인 빌라왈 부토와 함께 파키스탄 인민당(PPP) 공동 총제로 임명되었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제11대 대통령을 역임합니다. 이후 2018년에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고, 테러리즘과 극단주의와 싸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을 합니다. 그는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태권도와 사격을 즐기는 젊은이입니다. 2007년 어머니가 암살된 후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공동 총제로 임명됩니다. 이것이 그의 정치 입문의 계기였고 2018년에 총선에 당선되어 파키스탄의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국회 인권 상임위원회 위원장이었으며, 2022년에는 임란 칸 전 총리의 불신임안을 주도하고, 셰바즈 샤리프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중국 미국 등과 투자와 협력을 추진하고 있고, 인도와의 기장 완화와 카슈미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업적과 활동으로 그는 파키스탄 차기 총리 후보로도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지지자들과 일부 언론에서는 이 젊은 정치인이 파키스탄의 희망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를 '부토 가문의 상속자'라는 비판과, 그의 정치적 경험과 능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2007년~9년까지만 해도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의 우르도 실력만으로도 가십거리를 만들어 비판했습니다. 영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빌라왈은 우르두어보다 영어를 더 잘했기 때문에 연설 중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성형 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꾼다거나 상품의 단위를 잘못 쓴다거나 등등 그럴 때마다 이슈가 되고 풍자가 되곤 했습니다. 수감 중인 임란 칸도 빌라왈의 우르 두를 비판했고, 빌라왈은 '내 우르두를 논하기 전에 유학 중인 자기 아이들 우르두나 제대로 가르치라'하며 대답을 한 일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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